▲ 글쓴이 정혁기는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졸업 후 금융, 교육, 언론, 출판 분야에 종사했으며 현재 도시농업, 도농교류, 농귀촌 분야의 일을 하고 있다.

다산 정약용의 둘째 아들 정학유는 1843년에 쓴 월령체 장편가사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에서 5월을 이렇게 읊었다. 농가월령가는 음력에 맞춰 기록된 것으로, 농가월령가의 4월은 지금 달력으로는 5월에 해당한다.

사월이라 한여름이니 입하 소만 절기로다 / 비 온 끝에 볕이나니 날씨도 좋구나 / 떡갈잎 퍼질 때에 뻐꾹새 자주 울고 / 보리 이삭 패어 나니 꾀꼬리 소리 한다 / 농사도 한창이요 누에치기 바쁘구나 / 남녀노소 일이 바빠 집에 있을 틈이 없어 / 적막한 대사립을 녹음에 닫았도다 / 면화를 많이 하소 방적의 근본이라 / 수수 동부 녹두 참깨 사이 심기 적게 하소 / 갈대 꺾어 거름할 때 풀 베어 섞어 하소 / 무논을 써을이고 이른 모 내어 보세 / 양식이 모자라니 환곡타 보태리라
(중략)
석탄일에 등 달기는 산촌에 바쁜 일 아니나 / 느티떡 콩찌니는 제때에 별미로다 / 앞 내에 물이 주니 고기잡이 하여 보세 / 해 길고 바람 자니 오늘 놀기 좋겠구나 / 맑은 시내 모래밭을 굽이굽이 찾아가니 / 찔레 늦은 꽃은 봄빛이 남았구나 / 가는 그물 둘러치고 은빛 큰 고기 후려 내어 / 너럭 바위에 노구솥 걸고 솟구쳐 끓여 내니 / 아무리 산해진미라도 이 맛과 바꿀소냐

도시화율이 86.5%나 되고 전통 농촌문화와 단절된 삶을 살아가는 현대 도시인에게‘ 농가월령가’에서 묘사된 철과 일거리가 실감나거나 생활에 와 닿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끄덕끄덕 몸 장단에 맞춰 한 줄 두 줄 천천히 음미해 읽어가노라면 5월의 분주한 농사모습인 모내기, 도랑치기, 옷장만, 누에치기, 분봉, 천렵 등이 펼쳐지는 정경에서 멋과 재미가 전해진다. ‘농가월령가’의 맛이다.

정학유가 말한대로 5월은 입하(立夏)로 시작되고 6월의 망종(芒種)사이의 소만(小滿)의 절기다. 입하는 바야흐로 이른 여름에 들어서는 철을 뜻하고 소만은 말 그대로 어린 생명이 가득하다는 것 일테니 산, 들판, 시내에 풀, 나무, 벌레, 새, 물고기 등 뭇 생명들로 자연이 채워진다는 철이겠다. 또한 5월은 어린이날이 있고 지금은 어버이날로 바뀌었지만 어머니날이 또 있으니 사람에게도 새끼와 어미를 되돌아보는 철이기도 할 것이다.

2012년은 정약용 탄생 250주년이었다. 기념행사에 ‘농가월령가’도 그 한자리를 차지했는데, 정학유가 문인으로 평생을 살아가면서‘ 농가월령가’를 지은 것은 아버지 다산의 영향이 컸을 것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아버지 다산은 먼 전라도 땅 끝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집안이 몰락할 지경에 처한 자식들에게 편지를 쓰곤 했는데 내용 안에는 글을 손에서 절대 놓지 말기를 거듭거듭 훈육하고 또 자립적이고 자급적인 농사일을 권한 대목이 들어 있다. 최근 도시농업이 관심을 끌고 있는데 다산 정약용은 도시인에게 자립 농업의 존 재 의의와 마음자세를 일러주고 있어서 도시 농업의 스승으로 삼아도 될 것이다.

4월의 날이 봄이 거친 걸음으로 다가서며 겨울을 구석으로 밀쳐내며 오락가락 일진일퇴 하는 날씨였다면 5월은 바람 끝이 완연히 부드러워져서 밀물 들어오듯 여름으로 들어가는 날씨다.

이 시기 농사일의 첫째는 단연 모내기가 될 것이다. 지금 처럼 먹을거리가 풍족하지 않던 시기에는 5월은 ‘보리고개’라 부르던 양식 떨어져 배고픈 때였을 것이니 농가월령가에서도 “양식이 모자라니 환곡타 보태리라”고 적고 있다. 더구나 5월의 모내기 하는 벼는 가을에 가서나 수확이 될 것이니 푸르게 자라는 보리밭이 더디게 느껴졌을 것이다. 보리 수확시기는 6월초 무렵이다. 5월 중 하순~6월 초순에 벼 모내기를 하고 보리를 수확하는 철이니 농민에게 이 시 기는 가장 중요한 때가 아닐 수 없다.

▲ <사진=정혁기>

벼농사는 5월에 모내기하기 전부터 이미 시작된다. 보통 4월 하순경에 볍씨를 준비해서 처음 하는 일이 염수선과 종자소독이다. 염수선이란 물에 소금을 넣어 비중을 1.13 정도로 맞춰 볍씨를 소금물에 담궈 뜨는 종자를 걸러내어 좋은 종자를 가려내는 일이다.

이어 종자소독을 한다. 친환경 벼농사의 경우 화학약제 대신 ' 냉온탕침종법'으로 종자를 소독하고 있다. 50~55℃ 되는 따뜻한 물에 10~20분 동안 푹 담근 후 지하수 같은 찬물로 식혀주는 소독 방법이다. 키다리병, 선충과 입고병 등에 효과가 크다. 소독을 마친 볍씨는 물에 담그고 물을 매일 갈아준다. 수 일이 지나면 볍씨 싹이 트는데 때를 맞추어 모판상자에 파종하여 모내기 할 때까지 기른다.

5월 중하순~6월 초순이 모내기 철이니 벼가 논에 등장하기 전 대략 40여 일 동안 육 모하는 셈이다. 이 시기에 논은 물 로타리 를 친후 물이 채워져 황홀한 농촌 풍광을 연출해 낸다. 모내기를 대비해 논마다 물을 가득 대놓아 해가 넘어가는 논에는 가득한 물이 반사되어 마치 유리면처럼 반짝인다. 그 풍경을 함께 바라본 농민이 이를 다음과 같이 묘사해 보내 왔었다.

이 나라의 이 시절은 저렇게 물빛 축제를 벌입니다

논에 물이 들어가는 시절입니다. / 시냇물도 들어가고, 산골을 돌고돌아온 냉정한 물도 들어가고, / 푸른 산천 빗질하던 / 봄비 또한 두말없이 들어갑니다. // 논이란 논에 물이 다 들어 온 벌판이 거울처럼 닦이면 / 스러지는 또 한 하루에 뒤가 무겁던 석양빛도 / 먼 산위를 미적거리다 말고 / 옳다구나 들어갑니다. // 지나가던 바람마저 지나치지 못하고 물위로 내려올 때, / 산이며 들이며는 아버지의 다정한 어깨 무동 타는 / 아이처럼 밀고 밀려가는 잔물결 등에 오르고, // 이때쯤이면 밝혀지는 이 집 저 집 작은 등불들은 / 어깨동무 파문 사이로 끼어들 데를 엿보기도 합니다. // 둑새풀에 자운영에 지난 겨울 자리잡았던 들풀들이 / 겨우 목만 내밀고 / 이게 웬 소동인가 어리둥절한 사이, 이 나라의 / 이 시절은 저렇게 물빛 축제를 벌입니다.

▲ <사진=정혁기>

 
물빛축제! 벼농사와 물은 뗄 수 없는 관계다. 이삭이 여물어 수확할 때까지 물관리는 쌀농사의 핵심기술이다. 재배기원에 의하면 벼는 본래 습지에서 자라던 식물이기 때문에 거의 전 기간을 물이 대진 상태에서 자란다.

그렇지만 물이 충만한 자연 상태만으로 자라는 것은 아니다. 쌀농사의 물 관리 요령은 어느 때 는 많이 대어야 하고 어느 때는 얕게 대며 경우에 따라서는 물을 빼주는 수심조절에 대한 깊은 지혜가 반드시 필요하다. 예컨대 추운 지역이나 이상저온이 온 해는 물을 깊게 대줌으로써 냉해를 줄이기도 한다.

벼농사는 물의 예술이 아닐 수 없다. ‘물빛 축제’이고 생명의 예술이다. 여기에서 농부는 그 예술과 축제를 펼치는 주인공이다. 이 일은 비단 이곳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중국, 일본 등 동남아 지역을 비롯해 세계각지에서도 물의 예술이 펼쳐진다.

5월은 벼농사 육모와 모내기 말고도 아주 바쁜 농사철이다. 밭갈이, 거름주기, 두둑 만들기, 멀칭, 파종, 육모 등 밭농사, 하우스 농사가 연일 이어진다. 고추, 가지, 토마토, 콩, 옥수수 등등 밭작물 농사일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삐 몰린다. 노루가 애를 업어가도 쳐다보며 손에서 호미를 놓지 못한다는 철이다.

그러는 중에 세월이 간다. 생동하는 5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