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원일 이사(슬로푸드문화원 원장)

1990년대 운전면허를 따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마주 오던 자동차에서 상향등이 번쩍 켜졌다. ‘왜 그러지? 내가 무엇을 잘못했지?’ 하는데 그 뒤로 차량 몇 대에서 연속으로 경고를 한다. 커브를 도는데 경찰이 숨어서 속도위반을 단속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함정 단속도 많았고, 딱지 떼는 대신에 소액 뇌물도 잘 통하던 시대였다. 그랬다. 그래서 시민들끼리 암묵적인 약속으로 진행 방향에 함정 단속이 있으니 조심하라고 알려주었던 것이다. 그걸 안 다음에 나는 반대편 차선에서 경찰이 단속하는 것을 보면 반대편 차량에게 상향등 켜 주는 재미로 운전을 했다. 함정 단속하고 뇌물받는 불의한 경찰의 공권력에 시민들은 우기고, 잡아떼고, 뇌물주고, 상향등 켜면서 불의하게 저항하던 시대였다.

이것이 그나마 1987년 6월 항쟁으로 민주화된 사회의 풍경이었다. 당시 청년들은 세상이 확 바뀔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사회는 참으로 더디게 변했다. 어떨 때는 심지어 거꾸로 갈 때도 있었다. 불의한 공권력을 거의 날마다 마주 할 때도 있었다. 할 수 없이 함께 불의해져가고 있었다. 민주화가 어렵다며 포기가 될 즈음 촛불시민항쟁이 일어났다. 세상이 금세 바뀔 줄 알았는데 바뀌지 않아 답답했고, 변하지 않을 것 같아 답답했는데 갑작스레 세상이 바뀌었다. 그렇게 오랜 세월 달팽이 걸음으로 어렵게 얻은 교훈이 국민주권(國民主權) 의식이다. 1948년 헌법 제정할 때부터 있었던 제1조 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조항이 비로서 국민 속에 깊게 뿌리내리는 순간이었다.

법과 제도의 변화가 시민의 의식 변화로 이어지는데 가깝게는 30년 길게는 70년이 걸렸다. 1948년 헌법 제정과 1987년 6월 항쟁, 그리고 2016년 11월 촛불항쟁까지 ‘국민주권’ 의식의 성장은 더디게 진행됐다. 헌법에 보장된 ‘국민주권’ 조항은 돌고 돌아 70년 가까이 되어서야 지난 겨울 촛불시민들 속에서 그 빛을 발하게 됐다.

1948년 대한민국 헌법이 제정되던 해에 UN은 ‘세계인권선언’을 채택했다. 인권선언에서는 음식권(Right to Food, 먹거리 기본권, 식량권)을 처음으로 인권의 하나로 언급했고, 이후 개념이 발전되어 세계 여러나라에서 시민의 음식권리를 존중, 보호, 충족시키기 위한 법과 제도가 만들어졌다. 한국에서는 지난 6월 20일 박원순 서울시장이 ‘서울시 먹거리 기본권 선언문’을 발표했고 올해 안에 ‘서울시 먹거리 기본조례’가 제정될 전망이다. 한국에서도 본격적인 음식주권의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음식이 하나의 권리라는 사실, 그것도 시민 누구나 좋은 음식을 섭취할 권리를 갖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무엇보다 시민 스스로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하다. 아무리 좋은 법과 제도가 있어도 시민들이 향유할 수 없다면 소용이 없다. 특히 권리에는 반드시 책임과 의무가 뒤따른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주권자는 권리만 주장할 수 없다. 시민이 먹거리 시스템을 만들어가는 책임있는 당사자라는 것을 인지하고 책임있는 음식 선택과 소비, 폐기의 활동 의무를 질 수 있어야 한다. 먹거리 문제로 사고가 발생하면 주로 생산자와 공급자만 코피 터지고 끝나는데 이것은 근본 해결책이 아니다. 국민 모두의 문제로, 책임으로 여겨야 문제가 해결된다. 결과에 분노하지 말고 과정에 참여하는 시민 주권 의식이 중요하다.

음식 주권 시대의 특징은 소비자가 음식 문제 해결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감시와 적발, 인증 시스템에 목을 매지 않고 소비자 스스로 선택 능력, 향유 능력을 높이는 사회가 음식주권 사회이다. 단순히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소비자의 역할에서 벗어나서 어떻게 먹거리가 생산되는지, 또 이와 관련된 문제점이 무엇인지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소비자가 많아지는 것이 음식주권 사회이다. 지나가는 상대편 차량을 무심하게 대하지 않고 함정 단속 정보를 주기 위해 라이트를 깜빡이듯이, 좋은 먹거리가 있으면 서로 적극적으로 신호를 보내는 것도 음식주권자의 좋은 자세이다.

이제 <식량닷컴>의 역할도 다원화되어야 한다. 문제점을 비판하는 역할과 함께 좋은 먹거리를 전달하는 역할이 함께 되어야 한다. 음식 주권 시대에 <식량닷컴>의 역할 변화를 기대해본다.